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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효진의 인간 탐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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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사모
작성일17-07-27 11:04 조회4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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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로스 아버지 밑에서 裕福하게 자라



그는 1947년 2월11일, 아버지 崔英錫(73세시 작고)씨와 어머니 洪聖念(80) 여사와의 사이에서 2男2女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 成基씨(56)는 현재 요식업을 하고 있고 그 밑으로 여동생이 둘이 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주르르 흘러 나왔다.



『부산시 동구 초량 2동 415번지 7통 3반입니다』

부산 사람이 아니랄까 봐 몹시 겁이라도 먹은 사람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초량초등학교와 대동중학교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서 서라벌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님은 뭘 하셨습니까?


『배를 타셨습니다. 마도로스였어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무역선을 타셨습니다. 아프리카까지 다녀오시곤 했습니다. 한 번 나가시면 6개월도 걸리고 1년도 걸리고 그랬죠. 그러면서 무역도 하셨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퍽 어렵게 자랐다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 저는 아주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오신 유성기도 있었습니다. 또 그때 벌써 제 형하고 둘이 서울로 유학을 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 밥먹는 것도 힘들 때 아녔습니까?』

―그래 어려서도 가수가 될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려선 저는 클래식 가수가 될라고 했습니다. 5학년 6학년 때,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대회에서 연속으로 두 번 1등을 했습니다. 6학년 때 지정곡이 「소나무야, 소나무야…」 하는 「소나무」였고요, 자유곡은 「깊은 산 속 옹달샘…」이었지요』

―서울 유학은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형님이 서울서 학교를 다녔는데, 저도 그냥 가고 싶어서 올라왔어요. 형과 함께 장위동에서 하숙을 했습니다』

―본명(崔弘基)이 참 좋은데요. 왜 이름을 바꿨습니까?


『노래를 처음 시작하고 나서 최홍기가 그냥 보통 사람 이름 같아서 崔勳이라고 할라고 했죠. 그런데 崔씨가 영 예술하는 사람의 성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좀 기억하기 쉬운 성을 찾은 게 羅씨예요. 그담에 勳자를 붙이니까 兒자는 그냥 나오더라구요. 이름이 「훈」이라면 부를 때 「훈아」 카고 부르잖아요. 그래서 羅勳兒가 된 겁니다. 한자로 써 놓고 보니까 기가 막혀요. 어린 아이(兒)가 훈장(勳)을 받는 것 같은 이름이잖아요』

―고등학교 이름이 서라벌 예술고등학굔데 예술을 집중적으로 배우셨나요?


『연극, 음악, 미술 이런 걸 많이 가르쳤습니다』

―공부는 잘했던가요?


『못한 공부는 아니었거든요. 중학교때 선생님이 반에서 5등 안에 들어야 서울 가는 원서를 써준다고 해서, 제가 열심히 했더니 반에서 2등을 했고, 전체에서 7등을 했어요』

―서울 와서 학교 생활은 어땠어요.



『공부는 제대로 안 했습니다』

―羅勳兒씨가 소위 일류학교에 진학했더라면 지금처럼 가수가 안 됐을 것 아닌가요?


『당연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수가 됐다고 아버지께서 10년 전 73세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저를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아니 「천하의 나훈아」가 됐는데도!


『그럼요. 은퇴하고 서울에 올라와 사셨는데 그때까지도 저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뺑 돌아버린 레코드社 사장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제 하셨습니까?


『사실 전 너무 쉽게 가수가 됐습니다. 제가 가수가 되기 위해 고생한 시간이 한 시간도 안 되니까요』

―참 이상하네! 지금은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하는데!


『그때 난 클래식 성악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냈다가 아버지한테 너무 혼이 나서 내놓고 말할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저한테 판검사나 의사가 되라고 하셨죠. 그래도 제가 우리 형제들 중에선 공부를 좀 낫게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저한테 기대를 많이 한 겁니다. 그런데 제가 느닷없이 노래를 해 놓으니까 아버지가 펄쩍 뛰신 거지요』

―그래 어떻게 가수가 되셨어요?


『아버지 몰래 한 겁니다. 65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작곡가 심형섭씨가 학교 바로 옆 정릉에서 음악학원을 열고 계셨어요. (노래) 「물어물어 찾아왔소, 그 님이 계시는 곳에」(임 그리워)를 작곡하신 분입니다. 그 학원에 친구 따라 놀러 다녔는데, 거기 가서 제가 가끔 노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저한테 말은 안 하셨지만,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후에 그 분한테 들은 얘긴데, 그때 내가 노래를 너무 잘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분이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손진석 사장님하고 친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분이 손 사장님께 얘길 했대요.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이게 아주 쥑인다, 물건이 될 것 같다」 이랬다는 거요. 그러면서 「모른 척하고 한번 와서 보실랍니까?」 이래 됐나 봅니다. 말하자면 선보러 오락칸 거지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거기서 놀러 오라고 해서 갔어요. 갔더니, 그 분(심형섭)이 「노래 한번 해 볼래?」 그래요. 「어 좋지!」 뭐 뺄 것도 없어서 노래를 몇 곡 불렀어요. 그러면서 뒤를 보니까 나이 먹은 분들이 두세 분 앉아 계시더라구요.

그때 내가 당시 유행하던 「라노비아」도 불렀어요. 그랬더니 손 사장님이 내 노래를 듣고 시쳇말로 그냥 뺑 돌아버린 겁니다. 생긴 것도 시커멓고, 눈썹도 시커먼 놈이, 아, 부르는데, 그기 아닌기라!

그거야 그렇지요. 제가 그때 학교서 발성연습을 많이 했으니까. 기본이 어릴 때부터 돼 있었으니까요. 사실 지금도 두세 시간 혼자 공연해도 깨딱없는 게 그것(기본)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 손 사장님한테서 「취입 한번 안 해 보겠느냐」는 얘기가 왔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여기까지 오는 일이 너무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힘 하나 들이지도 않고,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거기까지 간 겁니다.

그때만 해도 LP 속에 한 곡 취입해서 판을 내는 데 6만원을 내야 했습니다. 그때 국민주택이 20만원 할 때니까 얼마나 큰돈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나한테는 돈이고 뭐고 밥 사줘 가면서 공짜로 내주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거저 취입을 했습니까?


『그렇지요. 「취입하자」 해서 「그래 뭐 해 보지!」 한 겁니다. 김영광씨가 작곡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 또 「천리길」 이런 곡을 포함해서 네 곡을 받았는데 연습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마장동이란 녹음실에서 녹음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기계에 두 채널밖에 없어서 노래 한 곡에 한 군데만 틀려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어요. 그래서 네 곡을 취입하자면 꼬박 하루가 걸리는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 저는 네 곡을, 연습 한 번 하고 취입하고, 연습 한 번 하고 취입하고…, 이렇게 한 번도 안 틀리고 6분씩 네 곡을 했으니까, 4×6=24에 앞뒤에 몇 분 더해서 딱 30분 만에 끝내고 나와 버렸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이 잘했다고 자장면하고 탕수육을 사줘서, 그걸 실컷 먹었어요』

뭉테기 돈에 퍼블릭 카에

―계약서는 썼던가요?


『계약서고 나발이고 없었지요. 내가 돈을 줘야 하는지, 내가 돈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레코드를 낸 겁니다』

―그담부터 계산이 복잡했겠네. 이거 큰일 났네!


『큰일 났지요. 그담부터는 회사에 가면 그냥 뭉테기 돈을 주는 겁니다. 심심해서 회사에 들리면 손 사장님이 50만원도 주고 100만원도 주고…, 그러더니 퍼블릭 카라는 것도 한 대 사주더라구요』

―학교는?


『3학년이 됐는데, 학교도 제대로 안 가는 겁니다. 이거(노래)에 바빠져 버렸으니까』

―레코드 내고 나서 방송사에 잘 봐달라고 외교도 하고 그래야 할 텐데, 그런 것도 했나요?


『그런데, 이기 거꾸로 된기라. 라디오에서 먼저 나와달라꼬 난린기라! 내가 그런데 다니기도 전에 라디오에서 펑펑 쏟아져 나와 버렸어!』

―또 큰일 났네! 부모님한테 들켰군!


『그런데도요, 우리 할머니하고 우리 어머니는 그게 난 줄 몰라! 왜냐하면 이름이 나훈아니까! 아버지는 외국에 가 계시고』

―처음 히트한 게 무슨 노래였지요?


『「천리길」이었어요. 오아시스에서 여러 사람이 내는 LP에 내 노래 「천리길」 한 곡을 끼워 넣어 먼저 낸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약속」을 차례로 낸 겁니다 한 곡에 6만원씩 돈을 내고 여럿이 판 한 장을 내는 데에, 돈 안 내고 무임승차한 내 노래를 하나씩을 끼워 넣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던 거죠』

羅勳兒의 데뷔로, 고등학생 崔弘基가 살판났을 뿐만 아니라, 오아시스도 살판이 났다.



『그때 사실은 오아시스가 빚에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노래가 히트하니까 빚을 다 갚고 벌떡 일어서게 돼버린 겁니다』

그런데 好事多魔(호사다마)라고 문제가 생겼다.



『「천리길」이 전국의 라디오에서 모두 1위곡으로 올라갔을 때 금지곡이 돼버렸어요. (노래) 「돌부리 가시밭길 산을 넘어 천리 길」 하는 노랜데, 이게 배호의 「황금의 눈」, (노래) 「사랑을 아시나요, 모르시나요」와 멜로디가 똑같다고 해서 금지곡이 됐습니다. 배호씨가 저보다 1∼2년 선밴데, 한참 날릴 때였죠』


글쓴이/ 나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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