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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와 남진으 트로트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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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사모
작성일17-07-27 11:10 조회4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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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와 남진 트로트 15년 
 
1970년대 당시 가요계를 휘어잡은 트로트 스타, 나훈아와 남진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속옷만 쳐들어오는 여성 팬이 있는가 하면 라이벌 구도를 이룬 두 사람 사이에서 피습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연도 곡절도 많은 가요계 최고의 라이벌 이야기를 돌아봤다.
가수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전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서 절대로 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최정상의 인기를 놓고 벌어진 두 가수의 세기의 라이벌전은 개인적 감정을 넘어 소속 레코드사·방송국·팬들은 물론, 출생지의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대결로 확대되는 부작용까지 있었을 만큼 대단했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며 가요계 최정상에 군림했던 남진은 45년 만에 부활한 대한민국가수협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가수들의 권익에 앞장섰고, 지금도 ‘영원한 오빠’로 활동하는 가수다.

얼마 전 괴담설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나훈아 역시 구수한 음색과 살살 녹아 드는 창법으로 여전히 성인 트로트의 황제로 군림한다. 이제 두 사람의 가수 데뷔부터 현재까지의 활동을 비교 분석하는 지상 라이벌 대결을 시작한다.

#1라운드- 데뷔곡
목포에서 정미소사업을 했던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남진의 데뷔곡은 1965년 1월 발표한 서울 플레이보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가출을 결행해 취입한 곡이지만 집안의 반대로 활동이 무산돼 한동안 사장됐던 노래다. 나훈아의 데뷔곡은 1968년 <천리길>로 공식화돼 있지만 사실 여러 가지 논란이 있다.

언론에 노출된 기사로는 <천리길>이 가장 앞서지만, 음반으로는 1969년 2월로 확인되는 <천리길>보다 앞선 1968년에 발표된 <내 사랑>과 <파도 넘어 천리길>이라는 노래가 더 있기 때문이다.

투박한 시골 총각의 이미지가 강했던 나훈아도 부산에서 고등학교 재학시절 무작정 상경해 음반사 사무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고 회사 마루를 닦으며 절치부심했던 배고프고 서러운 무명의 세월이 있었다. 어느날 장충동 녹음실에 심부름을 갔다 취입 예정인 가수가 나타나지 않자 대타로 노래할 기회를 얻었다.

투박한 생김새와 달리 구수하고 구성진 노랫가락에 즉석에서 음반 제작이 결정됐다. 나훈아는 예명이고 본명은 최홍기다. 남진의 본명은 김남진이다.

#2라운드-출세작
두 가수는 가출을 통해 가수의 길을 선택한 점에서도 같지만, 영화 주제가를 불러 히트의 발판을 마련했다는점도 공통적이다. 1967년 3월 발표한 박춘석 곡 <가슴 아프게>는 남진의 확실한 출세작이었다. 동명의 영화가 히트하면서 한 달 만에 남진은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이미자를 누르고 전국 레코드 판매성적 위에 등극해 당시 ‘4월의 최고가수’로 선정됐고 노래 또한 최고 인기곡으로 뽑혔다.

연기를 전공한 준수한 외모의 그는 이후 <서로 좋아해> <기러기 남매> <춘향전> 등 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군림할 수 있었다. 나훈아는 1969년 발표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예상을 뒤엎고 10만 장이 넘게 팔려 나가며 단숨에 인기 가수로 떠올랐다.

경제가 발전하고 온갖 변칙적 사랑이 등장한 1960년대에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정의를 내렸던 이 노래 역시 최무룡·윤정희가 주연배우로 열연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였다.

#3라운드-라이벌 대결 서막
청춘 스타로 떠오르던 남진은 1969년 7월 해병대 소속으로 월남에 파병돼 공백기를 맞았다. 그는 2년간 베트남 북부 호이안에서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2소대 소총수로 참전한 파월장병이다. 월남파병으로 국내에 없었던 남진은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남자가수상을 수상했다. 군복무로 인한 공백기간은 그의 인기 가도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청춘 스타로 떠오르던 남진은 1969년 7월 해병대 소속으로 월남에 파병돼 공백기를 맞았다. 그는 2년간 베트남 북부 호이안에서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2소대 소총수로 참전한 파월장병이다. 월남파병으로 국내에 없었던 남진은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남자가수상을 수상했다. 군복무로 인한 공백기간은 그의 인기 가도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물론 지구레코드는 남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70년 4월 <청춘> <파도의 블루스> 등을 수록한 신보를 발표했다. 하지만 남진의 군복무로 생긴 공백기에 나훈아는 1970년 <두 줄기 눈물>로 최정상급 가수로 급부상했다.

이에 긴장한 남진의 소속사는 베트남에 있는 남진에게 휴가를 내게 해 잠시 귀국시켜 신보 <사랑이 스쳐간 상처>를 발표해 나훈아의 <두 줄기 눈물>을 제치고 가요 차트 정상에 오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대중가요 사상 최대 라이벌인 남진·나훈아 대결의 서막이었다.
 
남진의 데뷔앨범 <서울 플레이보이>와 나훈아의 데뷔앨범 <천리길>
 
 
#4라운드-본격 라이벌전
1971년 6월 제대한 남진이 컴백하면서 세기의 라이벌 대결이 본격화했다. 기록상으로 최초의 ‘남진·나훈아 대결’은 1971년 7월 청계천에 있던 최대 규모의 살롱 ‘아마존’ 무대였다. 살롱 아마존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라이벌 대결 무대를 기획해 포스터까지 제작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두 가수의 대결을 보기 위해 홀은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남진의 불참으로 불발로 끝났다. 이 소식이 세간에 화제가 되자 MBC TV 가요 프로그램 <오색의 화원>에서 두 가수를 함께 초대해 노래 바꿔 부르기로 자웅을 겨루게 했다. 방송이 나간 후 “나훈아가 판정승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예상치 못했던 분위기에 남진은 시민회관 리사이틀 무대로 진검승부를 걸었다. 남진의 귀국 리사이틀은 가요계의 불황 타파는 물론, 당시의 뉴웨이브 음악인 포크·록 등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던 트로트를 부활시켰을 만큼 대성황을 이뤘다. 공연은 완전 매진을 기록하며 1971년 최대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

이에 자극받은 나훈아는 2주 후 똑같이 리사이틀 공연으로 응수했다. 관객 동원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 여부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나훈아 역시 매진 사례를 이루며 두 사람은 호각지세를 이뤘다. 10벌이 넘는 의상과 칼춤에서 고고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로 분전했지만 준비기간이 짧아 첫 리사이틀 공연 대결은 관객 동원 숫자에서 남진의 승리로 끝났다.

게다가 그해 가수왕은 공백기 부담이 있는 남진을 누르고 나훈아가 뽑힐 것으로 예상됐음에도 놀랍게도 남진이 1971년 MBC 가수왕에 등극하는 이변이 연출됐다. 남진과 나훈아 라이벌 대결은 사상 유례 없는 과열 현상으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5라운드-스크린 대결
라이벌전은 스크린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남진이 가수는 물론 영화배우로 최고의 성가를 드높이자 나훈아도 영화배우로 변신을 시도했다. 1970년 12월 코미디 영화 <웃겨주시네>를 시작으로 1971년 영화 <폭풍을 몰고 온 사나이>에 이어 나훈아가 출연한 <친구> <미움이 변하여> <쥐띠 부인>이 3개월 동안 연속 개봉되면서 배우로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또한 인기 절정의 여배우 문희와 함께 정진우 감독의 <풋사랑>에 출연해 3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몰이를 하고, 영화가 태국으로 수출되는 성공에 힘입어 두 사람은 영화배우로도 팽팽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두 가수가 함께 출연한 영화도 2편이나 있다. 윤정희가 주연한 1972년 작 <어머님 생전에>와 문희가 주연한 1973년 작 <기러기 남매>다. 두 영화는 라이벌 대결 열기를 등에 업고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뒀고 윤정희·문희도 덩달아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6라운드-리사이틀 재대결
해가 바뀐 1972년. 이번에는 나훈아가 ‘나훈아 꿈’이라는 타이틀로 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하며 선전포고를 했다. 트로트는 기본이고 통기타를 직접 들고 나와 당시 유행하던 포크송과 팝송에 전통 북치기와 가극 <갑돌이와 갑순이>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화려한 버라이어티 쇼로 승부를 걸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이에 11개 영화 중복 촬영으로 눈코 뜰 새 없던 남진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모든 영화 스케줄을 일시 중단하고 TBC TV의 간판 쇼 프로그램 <쇼쇼쇼>에서 최고의 여성 듀엣 펄시스터즈와 조인트 리사이틀로 대응했다. 당시 TV쇼로는 드물게 스튜디오가 아닌 인천 해변에서 야외촬영을 시도한 야심 찬 방송이었다.

문제는 방송사 간 경쟁으로 라이벌 대결 구도가 가열되었다는 점이다. TBC가 남진을 지원하자 라이벌 관계였던 MBC는 나훈아와 손잡으면서 가요계가 양분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또한 남진은 한 달 뒤 나훈아와 똑같은 장소인 시민회관에서 ‘72 남진 리사이틀’로 연타석 펀치를 날렸다.

관객 동원 결과는 5만 명 대 3만 명. 나훈아의 완승이었다. 나훈아가 1972년 남진을 지원했던 TBC의 ‘방송가요대상’에서 최우수 남자가수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며 라이벌전은 정점에 달했다.

그해 1972년 12월 MBC 10대 가수상 시상식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회였다. 남진과 나훈아 중 누가 가수왕이 되느냐가 장안의 최대 이슈였음은 말이 필요 없다. TBC와 달리 남진 쪽으로 대세가 기울자 나훈아는 명예 대위가 되어 파월장병 위문을 떠나 버렸다.
 
1969년 월남으로 파병된 남진. 2 1983년 남진·나훈아 공동앨범인 <스타경연>.
 
 #7라운드-점입가경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로 장안이 후끈 달아오르자 언론은 매일같이 두 가수의 신체조건에서 스캔들까지 시시콜콜 들춰내 비교하며 라이벌전을 부추겼다. 시민회관의 KBS <가수청백전>의 풍경은 당시 두 사람의 라이벌전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증명한다. 남진·나훈아 양측은 서로 꽃다발 공세, 화환 숫자 늘리기로 인기 세몰이는 기본이고 무대에서 여성 팬들과 키스신까지 연출했다.

또한 공개방송 때는 남진·나훈아 등장 때만 소녀팬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다른 가수들의 무대는 무관심으로 썰렁해지는 부작용도 심각했다. 결국 라이벌 관계는 두 가수의 소속 레코드사인 지구와 오아시스 레코드사 간의 전쟁으로 치달으며 점입가경으로 내달았다. 상대방의 연예활동은 물론 나이까지 예민하게 의식하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8라운드-스캔들 사고
가열된 라이벌전은 결국 사고로 이어졌다. 1972년 6월 시민회관 ‘쇼 스타 페스티벌’ 이틀째 공연에서 나훈아가 앙코르송으로 <찻집의 고독>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관객석에서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고 횡설수설하는 한 관객이 무대 위로 올라와 깨진 사이다 병을 휘둘러 나훈아는 왼쪽 뺨을 70바늘이나 꿰매는 참변을 당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피습당한 사건은 국내 가요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의혹의 눈길은 따가웠지만 결백을 주장했던 남진은 이 사건으로 가수분과위에서 제명 위기를 겪는 등 큰 곤욕을 치렀다. 1975년 나훈아를 폭행했던 그 관객이 이번에는 남진을 피습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옥고를 치른 그 관객은 5년 뒤 목포의 남진 집에 불을 지르며 질긴 악연을 이어 갔다. 남진은 군 제대 후 동향인 인기가수 조미미와 약혼설이 있었다. 스캔들로도 라이벌전을 벌였다면 다소 지나친 표현이겠지만 흥미로운 것은 조미미는 남진·나훈아 모두와 스캔들에 휘말렸다는 점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9라운드-팬
순박한 시골 청년 같은 건장한 나훈아의 구수한 노래는 젊은 여성들도 좋아했지만 특히 30대 이상의 기혼여성들에게 섹시한 이미지로 어필했다. 지방 극장 순회공연 때는 그야말로 수난의 연속이었다. 극성 여성 팬들에게 와이셔츠를 찢기고 손등을 할퀴는 것은 기본이었다.

심지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대담한 여성들로 인해 봉변을 다반사로 겪었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외모로 유독 젊은 여성들의 로망이었던 남진 역시 극성 여성 팬들의 등쌀에 항상 시달렸다.

꽃다발 공세는 기본이고 목에 매달리고 키스하려 들고 몸의 일부를 만지고 붙잡기는 예사로 벌어졌다. 심지어 숙소에 속옷차림으로 들어오는 여성 팬도 있었다고 한다.

#10라운드-컴백 후 현재
1980년 이후 사업가로 변신해 가수활동을 중단했던 두 사람은 1982년 나란히 재기에 성공했다. 그때 히트곡인 남진의 <빈잔>과 나훈아의 <잡초>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러닝타임도 똑같았다. 뒤늦었지만 1983년 두 가수의 공동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남진은 1998년 <조선일보>에서 조사한 건국 이후 가수 베스트50에서 10위에 랭크됐고, 2005년 문광부에서 수여하는 보관문화훈장도 받았다.

세기가 저물어 가던 1999년 나훈아는 KBS에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남자 트로트 가수로 선정되었다. 온 나라를 경악하게 했던 괴담설 등 순탄치 않았던 개인사에도 그의 노래는 1970년대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했던 수많은 청춘에게 짙은 향수를 달래준 멜로디였다.

또한 창법과 외모가 개그맨들의 흉내내기 대상이 되고, 너훈아 등 이미테이션 가수들까지 등장할 정도로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남진·나훈아의 세기의 라이벌 승부에서 ‘최후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라는 의문은 무의미할 것 같다. 두 가수의 많은 노래는 세월을 넘어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기쁨과 위로를 안겨주지 않던가?

비록 두 사람의 라이벌 대결이 과열현상으로 일부 부작용도 있었지만, 불황기의 당대 대중음악을 1970년대 대중의 최대 관심 장르로 부각시켰고, 무엇보다 국내 공연 콘텐츠의 질적 발전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자료출처: 블러그>chp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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