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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남진 라이벌 시절에 대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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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사모
작성일17-07-27 10:47 조회6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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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구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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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vs남진 라이벌 시대

글 /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전 략 ]

‘없으면 안 될, 그러나 있으면 껄끄러운 라이벌’ 구도, 그 첫 장면

먼저 옛날 기사를 하나 들춰보자. 아래 기사는 72년 1월 30일 자, 주간중앙에 실린 것이다. 남진 대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던, 민감한 시점에 나온 기사다.

‘울려고 내가 왔나’, ‘가슴 아프게’로 톱스타 자리에 오른 남진이 월남에 파병된 공백 기간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등으로 그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던 나훈아. 이후 남진이 귀국, 컴백리사이틀을 통해 화려하게 가요계에 복귀하면서 정상의 자리를 놓고 피할 수 없는 맞대결을 펼쳐야 했다. 특히 이들이 공식석상에서 서로 외면하고 있는 장면이 그대로 TV화면에 노출되었을 만큼 둘 간의 신경전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나온 기사이기도 했다.

기사 제목은 ‘연예계 소문난 쓴짝 단짝- ’72 더 잘해봅시다-남진 나훈아 방담(放談)’이다.
‘지나친 경쟁을 삼가고 잘해 나가보자는 것이 두 사람이 모두 바라는 바였다. 퍽 서먹서먹한 대담이었다.’는 기자의 멘트로 시작되는, 이 방담 기사 중 일부를 발췌해본다.

南(남진, 이하 南) : (남군은 노래 부르기 전, 또는 말하기 어려운 얘기를 하기 전에 반드시 헛기침하는 버릇이 있다. 헛기침을 몇 번하고 나(羅)군을 바라보며) 뭐라 할까, 그동안 훈아씨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석연치 않았어. 선배면 선배, 친구면 친구로 대했으면 좋았을 텐데...

羅(나훈아, 이하 羅) : 제가 비교적 사교성이 없는 것은 사실이죠. 누구를 만나든 ‘안녕하십니까’ 외에 필요 없는 말은 안 해요. 어느새 저도 후배들이 많이 생겼지만 대뜸 ‘야, 자’하지 않습니다.

南 : 하지만 가요계란 어느 세계보다 선후배를 따지는 곳 아냐?

羅 : 제가 인사성이 없다고 지적하시는 것 같은데 남선배가 인사를 몇 번 안 받는 것 같기에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인사할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마음먹은 지 두 달 되었습니다.

南 : 그랬었군.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인 뒤) 앞으로는 부드럽게 지내세.

羅 : 좋습니다. 이젠 선배대접 착실히 할 테니 남선배도 후배사랑 좀 해주이소. 사실 우리를 ‘숙명적인 라이벌’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신문, 잡지들이 부채질한 것 아닙니까? (그때서야 얼어붙은 듯 했던 분위기가 다소 풀렸다. 꼿꼿하게 앉았던 두 사람이 자리를 고쳐 앉고 담배를 꺼내 무는 남군에게 나군이 불을 붙여준다.) -이하 생략.

이렇듯 한 치 양보도 없이 펼쳐지는 이들과 주변 관계자들을 둘러싼 경쟁 구도는 매스컴의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이후 무대와 스크린을 통해 펼쳐지는 이들의 숨 막히는 라이벌 대결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으며 당시 ‘오빠부대’까지 2등분시킨 것은 물론 음반사, 영화사 심지어 방송사까지 양분되는 현상까지 초래되었다.

일거수일투족을 다룬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러한 뉴스들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가 있기에 느껴지는 체감온도가 상대적으로 달랐다. 뉴스 이면, 혹은 행간 사이에 어떤 의도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당사자나 주위 관계자들, 그리고 팬들은 촉각을 곤두세웠고 때로는 오해 아닌 오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매스컴 보도 이후의 반응조차 또다시 가십거리가 되는 이 라이벌 구도를 매스컴이 결코 놓칠 리 없었다.

시시콜콜 서로가 서로의 비교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때로는 더욱 빛을 발하기도 했고 반대로 빛이 바래기도 했다.

[중략]

이들은 우리나라 ‘오빠부대’의 원조들이다. 지금도 수많은 팬을 몰고 다닌다. 특정 스타나 장르를 열성적으로 선호하는 대중문화 현상을 일러 ‘팬덤(fandom) ’이라고 지칭한다.
자칫 ‘오빠부대’ 등 무분별한 10대 소녀들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팬덤의 역할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팬덤문화도 시대분위기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해, 어느덧 팬클럽은 '제4의 권력'으로 자리하고 있다. ‘오빠부대’를 넘어서 ‘대중문화 파수꾼’으로 그리고 ‘문화의 주체’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두 스타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또 다른 파워다.

2002년 창립되어 현재 2만6천명의 회원이 활동 중인 ‘나사모(나훈아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창립멤버이자 초대 회장을 맡았던 가수 도훈은 누구보다 나훈아의 컴백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나사모의 영문 이니셜이 ‘R.O.K.'입니다. ‘Republic of Korea’의 준말로 ‘대한민국 대표가수’, 혹은 ‘국민가수’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말 그대로 국민가수이기 때문에 보다 대중음악 활성화에 기여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오랜 기간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은 스타로써 언제라도 그 사랑을 팬들에게 되돌려줄 의무가 있고 또 그럴만한 충분한 위치에 있는 분입니다.”라고 강조하며 트로트의 자긍심과 대중음악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남진 나훈아의 전성기’가 곧 대중가요의 전성기, 초창기음반 비교
그렇다면 우리 가요계를 이끈 쌍두마차로 트로트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던 이 둘의 활약상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먼저 이들이 발표한 당시 음반들을 살펴보자. 우선 데뷔 이래 76년까지 각각 발표한 음반에 수록된 곡수를 비교해보았다. 1차 비교를 이 시점까지로 잡은 것은 군복무로 인한 공백 기간 때문이다.
각각 군 복무를 마치고 가요계에 정상 복귀해 활동하는 1976년까지를 우선 분석해보았다.

지난 호 예고에서 밝혔듯 이들은 둘 다 ‘작곡가 한동훈작곡사무실’ 문하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들은 한 핏줄인 것이다.
가요계 데뷔는 남진이 먼저다.
1965년 한동훈 작곡의 ‘서울 플레이보이’로 등장해 67년, ‘울려고 내가 왔나’, ‘가슴 아프게’를 잇달아 발표하며 정상에 오른 뒤 69년, 월남 청룡부대에 파병된다.
그 사이 복병으로 등장, 그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바로 나훈아다.

나훈아는 한동훈작곡사무실에서 지도교사였던 작곡가 심형섭의 도움으로 1968년 데뷔곡인 ‘내 사랑’과 ‘약속했던 길’을 발표하며 데뷔한 이후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를 잇달아 히트시키며 남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정상의 자리를 단숨에 차지했다.

나훈아 또한 73년 6월에 공군에 입대해 76년 7월에 제대한 후 가요계에 복귀한다.
각각 데뷔 후 76년도까지 연도별 발표 곡수는 아래와 같다

[도표] 남진 vs 나훈아 연도별 발표곡수 비교

연도 --- 남 진 ---- 나훈아 ---- 비고
1965 --- 13 곡
1966 --- 14 곡
1967 --- 77 곡
1968 --- 13 곡 ------ 8 곡
1969 --- 119 곡 ---- 82 곡 ----( 남진 1969년 7월 월남파병.)
1970 --- 52 곡 -----167 곡
1971 --- 49 곡 ---- 188 곡
1972 --- 63 곡----- 170 곡
1973 --- 56 곡 ------77 곡 ---- ( 나훈아 1973년 6월 공군입대 )
1974 --- 91 곡 ----- 50 곡
1975 --- 78 곡------ 69 곡
1976 --- 102 곡----- 87 곡 ----( 나훈아 1976년 7월 군 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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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845 곡---- 898 곡

참고로 이 수치는 필자가 보유하고 있는 음반을 데이터 베이스해 나온 수치이므로 실제 곡수는 이보다 많다.
하지만 이 표본조사는 같은 조건 하에 조사한 것으로 어느 한 쪽에 의도적인 치우침이 없었음을 밝힌다.
또한 같은 곡이 여러 음반에 중복 수록된 것도 곡수에 포함시켰다.

이 표본 조사로 확인된 발표곡수는 도표에서 보듯 남진 845곡, 나훈아 898곡이다. 참고로 당시 인기가수, 배호의 발표 곡수는 같은 기준으로 정리해본 결과 총 373곡이었다.

이들의 인기는 군 복무기간 중 이었던 공백 기간 동안 발표된 음반들에서도 확인된다.
먼저 남진의 경우 월남전에 파병된 공백 기간 동안에도 음반사 측은 계속해서 옴니버스 형태로, 혹은 독집음반으로 계속 음반을 출시했다.

그 뿐 아니라 파병 후 14개월만인 70년 9월, 25일간의 특별휴가를 받아 잠시 귀국했을 때도 음반사 측은 작곡가들을 동원, 짧은 시간에 무려 30여 곡의 신곡을 취입시켜 쏟아냈다
‘너만을 사랑한다/아빠 품에’(이재현 작곡), ‘이별 슬프게’(백영호), ‘사랑이 스쳐간 상처(박춘석)’, ‘철새’(고봉산)... 등 남진 사진을 전면에 내세운 음반만도 무려 다섯 장이나 한꺼번에 쏟아냈다.

나훈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73년도에 군 입대가 결정되자 음반사 측에서는 미리 신곡들을 취입, 주기적으로 계속 음반을 발매했다.
‘정열(남국인)’, ‘사랑의 느티나무(백창민)’, ‘처음 본 그대(백영호)’, ‘인생은 주막(변혁)’ 등을 타이틀로 한 음반들이 그것이다.
이 음반들은 모두 지구레코드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러한 노래들은 꾸준히 전파를 탔기 때문에 대중들은 나훈아가 군복무 중이라는 공백을 거의 실감하지 못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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